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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관리자 | December 21, 2012 | view 9,272
25. 황제는 種馬였을 뿐이다. 
 
흔히 우리들은 '상서로운 날을 택일한다.'라고들 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즉 하고자 하는 사업, 결혼, 개업 등의 중요한 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시기를 택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러한 택일의 욕망은 동양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며 서양의 문화에서도 존재하고 있다.
 
상서로운 날을 택일하여 하고자 하는 일의 성공을 기원한다는 것은 인간 모두가 가지고 있는 소망 즉 자연과의 조화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간에 인간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신( 神 )들의 세계와 조화를 이루며 살고자 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고대 동양의 시간 사상에는 직선적( 直線的 )인 시간의 개념과 순환적( 循環的 )인 시간의 개념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인간이 자연과 신들의 세계와 조화를 이루며 살고자 하는 개념은 직선적인 시간개념일 것이다.
 
동서양 할 것 없이 가족의 계보를 기록하고 후대에 선대의 계보를 전승시키는 족보의 문화와 역대 천하를 지배한 왕조의 계보에 수많은 사자( 死者 )들의 기록은 영원히 되풀이되는 탄생과 죽음, 그리고 재생의 순환, 다시 말하면 자녀의 출생과 부모의 죽음 만물의 생장과 소멸은 순환적인 시간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1] 서기 978년 태평천국 3년 달력이다. 중국의 역법은 천자( 天子 )만이 다룰 수 있는 국가기밀 문서였다.
기원전 800년 경부터 천자라는 존재가 하늘을 대신하여 군림하였다. 인간세계는 형태가 없어 보이지 않는 신들의 세계를 대변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천자는 하늘과 인간의 중재자이며 지배자였다. 즉 우주의 주인인 하늘 옥황상제( 玉皇上帝 )을 대신하여 인간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 자였던 것이였다.
 
그러므로 천자는 일월성신( 日月星辰 )의 운행을 정확하게 파악하여야 하였으며, 우주 만물의 주기와 일치되는 합리적인 왕명을 내려서 농사와 사회생활과 종교행사 등에 편의를 제공해 주어야 하는 의무도 있었다.
 
[그림 2] 기원전 200년 만들어진 중국의 나침반이 발전된 것이다. 20세기 초기의 작품이다. 고대의 중국인들은 이 나침반을 이용하여 음양오행과 풍수지리와 점을 치기도 하였다.
기원전 221년 최초의 제국 진( 秦 )나라가 수립되자 진시황은 이 거대한 제국을 일사불란하게 통치하기 위해서 가장 정확한 달력이 필요하였다. 전국시대( 戰國時代 )에 수없이 만들어진 여러 나라의 달력을 폐쇄하고 가장 정확한 달력을 제국의 모든 곳에 배포하여야 하였다.
 
이미 기원전 1500년 경에 십간( 十干 )과 12지( 12支 )를 순차적으로 조합한 육십갑자가 사용되었으며,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이였든 간에 좋은 날을 택일하는 방법을 알 수 있는 역법은 기원전 1500년 전에 사용되었다.
 
우리가 현대사회에서 아직도 즐겨 사용하는 고대의 역법에서 발달된 사주( 四柱 )는 기원전 200년 경에 생겨났다. 이 모든 역법은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여 만들어졌으며, 고대에도 일월성신( 日月星辰 )의 운행을 정밀하게 관측할 수 있는 관측의( 觀測義 )들이 만들어졌음이 분명하다.
 
예로부터 진정한 제왕은 시간을 가장 먼저 정복을 하였다. 인류 역사를 보면 강력한 군사력을 양성하여 제국을 이룬 자가 제왕이 된 것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 그들의 통치 이념 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접근한 것이 바로 시간이었다. 제왕의 탄생의 예언이 있을 때마다 천문과 역술을 보는 것도 바로 시간과의 관계를 버릴 수 없는 역학적인 관계가 성립되어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고서를 보면 중국의 시간에서는 불행하게도 백성을 위한 시간의 발달은 찾을 수 없다. 시간은 오직 황제만을 위하여 필요하였으며 시간과 관계가 되는 천문과 역법도 황제만을 위한 방법이요 수단이었다. 간혹 우리는 책에서나 TV의 드라마를 보면 황제 또는 제왕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생활을 하였으며, 특히 여자 관계에서 제왕이 날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애첩을 찾아서 잠자리에 드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과 드라마는 고대 또는 역사 속의 황제와 제왕들의 생활과는 분명하게 거리가 있다. 단언하건대 지극히 일부 제왕의 사생활이요 거짓된 기록이며 픽션이다. 필자의 시간연구 속에서의 제왕과 황제의 삶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황제는 절대 권력자였으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잘 길들여진 애완용 인간들이었을 뿐이었다.
 
[그림 3] 소송( 蘇頌 )이 개봉( 開封 )에 세운 혼천의다. 천문을 관측하고 미래를 예언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으나, 전쟁의 와중에 적국의 장수들이 자신들이 침략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 불태웠다는 설도 있다.
권력에 맛들여진 주변의 신하들과 세력가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수단에서 필요한 존재였을 뿐이었다. 황제는 순수한 혈통 즉 황제감을 생산해야하는 종마( 種馬 )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하였다. 인류 역사 속에서 인간다운 즉 인간의 제왕이며 사람다운 삶을 누린 제왕은 극히 드물다. 시간의 역사 속에서 제왕들의 삶과 통치 그리고 그들의 일상 생활은 그야말로 애완용이었으며 좋은 왕손을 생산하여야 하는 종마였다.
 
시계의 역사를 연구하다보면 정도가 매우 높고 예술성과 스케일이 큰 물시계들이 중국에서 많이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시계 역사를 깊이 연구하면 고대 중국의 시계가 시계로서가 아니라, 천구의( 天球儀 ), 또는 혼천의( 渾天儀 )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들은 왜 우주에 대한 관심이 많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게된다.
 
왜 고대 중국인들은 시계를 천구의( 天球儀 )와 혼천의( 渾天儀 )로 발전 시켰을까?
 
그것은 중국의 황제는 단순한 통치자가 아닌 우주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즉 황제는 인간이 아닌 천자( 天子 ) 이었으며 하늘의 옥황상제의 대리인으로서 군림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황제가 바뀌게 되면 모든 것이 새로이 시작되어야 했으며 가장 큰 시간의 개념인 달력이 개력( 改曆 )된다는 제도를 생각해보면 황제의 위치가 바로 우주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4] 중세 유럽의 고문서에서 찾은 혼천의 설계도이다.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천체행성들의 운행을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이 개력제도의 근거에는 중국의 황제는 우주적 존재로 세상의 모든 것은 황제를 중심으로 회전되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우주론에 입각한다면 황제로 될 사람이 태어났을 때, 혹은 더 소급하여 회임 하였을 때의 하늘의 성좌( 星座 )의 위치마저 주의 깊게 관찰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중국 황제의 밤잠자리를 기록한 용례( 用禮 )를 보면 황제를 에워싼 후궁들이 황제와 하루 밤을 함께 할 순번이 쓰여 있다. 기록에 의하면 후궁들 중에서 최고의 지위에 있는 황후( 皇后 )는 매달 15일째에 즉 정확하게 만월 가까운 날에 황제와 잠자리를 함께 하도록 할당되어 있으며, 이와 같이해서 회임( 懷妊 )된 아기는 무상( 無上 )의 미덕( 美德 )이 안겨지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즉 황태자를 회임( 懷妊 )할 수 있는 날을 배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관장( 女官長 )은 후궁( 後宮 )들이 황제와 교섭( 交涉 )을 가질 때의 상황을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기록하여 차기 황제를 결정 지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므로, 고대 중국에서는 황제의 생활상 등 모든 공사에 걸쳐서 혼천의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림 1]의 시계는 1088년에 소송( 蘇頌 )에 의하여 만들어진 극히 정도가 높은 혼천의 시계이다. 이 혼천의에 관해서는 후년을 위하여 신의상법요( 新儀象法要 )에 상세히 기록되어져 있어서 영국의 콘브릿지氏에 의하여 실험모형이 만들어져 그 성능의 우수함이 입증된바 있다.
 
이 혼천의는 하루를 24분할하는 진각호칭( 辰刻呼稱 )법과 당시 중국에서 사용한 하루를 100등분하여 사용했던 두 방법 모두를 만족시켜 주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림 5] 중세 유럽에서 제작된 혼천의다. 정교한 설계로 만들어진 교육용이다.
용례( 用禮 )와 신의상법요( 新儀象法要 ) 그리고 문헌들을 종합해 보면 중국에서의 시간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특히 천문과 역법은 중국에서 발달하였으나 달력을 만드는 역법과 시간을 분할하여 사용하는 방법 등이 철저하게 비밀리에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세종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인류역사에서 세종대왕과 같은 존재는 다른 여러 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세종대왕은 시간의 활용과 역법 등을 백성의 위민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서 중국으로 많은 학자들을 유학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중국의 역법에 접근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중국의 황제는 역법과 시간을 자신의 통치와 권력의 재생수단으로 철저하게 사용하였으나, 세종대왕은 어떻게 하면 역법을 활용하여 백성들의 농사에 많은 도움을 주어서 백성들을 배부르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실천한 제왕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참다운 제왕의 삶을 살면서 통치를 한 군왕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다. 세종대왕의 가장 빛나는 업적 중에는 한글의 창시가 있으나 그에 맞먹는 업적으로는 우리나라에 맞는 역법을 집대성한 칠정산( 七政算外篇 )이라는 달력을 만든 것일 것이다. 아마 한글의 창시와 칠정산 달력이 세종대왕의 업적 중에 가장 손꼽을 수 있는 업적일 것이다.
 
[그림 6] 중세 유럽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혼천의다. 유럽의 경매에 출품되어 구입하기 위해 참가 신청을 내었으나 회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경매에 참가할 수 없었다.
세종대 이전에는 중국의 역서를 받아서 사용하였다. 중국의 역서는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사용할 수가 없었으며(위도와 경도가 다르므로 일출 일몰 절기 등이 맞지 않았다) 또한 중국의 역법도 완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세종대왕은 우리나라만의 달력의 필요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조선의 조정은 계속해서 역서의 바탕이 되는 역법을 중국으로부터 배워와 우리나라의 경위도에 맞춰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다. 중국의 역법을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고유한 것으로 지정되어 있었으므로 역법을 연구하거나 개인이 역서를 제작 반포하는 것은 역모에 해당되는 중죄였기 때문이다.
 
즉 용례( 用禮 )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늘의 성좌( 星座 )의 위치와 달( 月 )의 운행 그리고 천문의 총아인 역법은 천자의 후계자인 황태자의 회임과 탄생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길일과 길조를 적국 또는 역모를 품고 있는 자들이 알고있다면 황제의 위치가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학자와 고려시대부터 시도되었던 학자들이 중국의 역법을 배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런 의미로 세종대왕은 진정한 제왕이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세종과 당시의 조선 학자들이 칠정산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혼천의( 渾天儀 )와 간의( 簡儀 )와 같은 정밀한 천문관측 기구들을 직접 제작하였다는 것이다. 세종대왕과 조선의 학자들은 직접 제작한 혼천의( 渾天儀 )와 대간의( 大簡儀 ), 소간의( 小簡儀 )를 이용하여 한양의 경도와 위도, 그리고 하지점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여 조선의 고유한 역법을 만들었다.
 
앙부일구를 만드는데 7년의 세월이 필요하였지만, 조선의 역법인 칠정산을 집필하는 데에는 2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광범위한 자료수집과 정밀한 천문기구제작, 인재등용 등이 이룬 개가였다.
 
[그림 7] 1442년(세종 24년) 조선의 학자들에 의해 편찬된 칠정산( 七政算 ) 원본이다. 가장 우수한 역법서로 전해지고 있다.
1442년(세종 24년) 조선의 학자들에 의해 편찬된 칠정산( 七政算 )은 우리나라 최초의 독자적인 역법서이다. 비록 아랍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편찬된 원나라의 회회력( 回回曆 )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역법이지만, 동시대의 여러 나라에서 발달된 여러 역법체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정밀한 천문기구를 이용하여 우리나라의 경위도에 맞추었으므로 가장 이상적이며 우수한 역법임이 틀림이 없다.
 
물론 조선의 역사에서도 관상감이 있어서 군왕의 잠자리를 관여한 기록들이 있다. 조선의 역법체계가 세종대에 이르러 체계화되자 조선의 군왕들도 잠자리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조선의 관상감 천문학자들은 중국의 용례( 用禮 )와 같이 군왕에게 왕비와 후궁들의 처소에 들어야하는 일자를 지정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방법은 여성의 배란기와 일치되지 않으므로 인하여 불행한 왕비의 탄생이 시작되는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림 8] 태양계 행성의 운행을 관찰할 수 있는 천문관의 설계도이다. 중세 유럽의 고문서에서 발견하였다.
천문학과 역법 속에서 만들어진 과학이 없는 용례( 用禮 )는 구중궁궐의 국모인 왕비에게 칠거지악( 七去之惡 )인 왕자를 탄생시키지 못한 죄인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뜻하지 않는 무수리에 의해서 군왕이 탄생되게 하였다. 백성의 위민( 爲民 )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하는 시간의 역법체계는 황제와 군왕을 신하들의 권력을 영속시키는 경주마(황태자, 왕세자)를 생산하는 종마( 種馬 )로 전락시키는 용례( 用禮 )라는 체계를 만들고 말았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용례( 用禮 )를 무시한 군왕의 말로가 비참하였으며 이들은 자신의 자손에게 왕위를 계승시키지 못하였다. 실록에서도 숙종이 장희빈의 처소에 왕손이 회임할 수 있는 날에 들지 못하도록 당시의 집권파였던 서인들이 왕비민씨의 처소로 들게 하려고 하였으나 숙종은 장희빈의 처소에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볼 때에 역대의 황제와 군왕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사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시간의 역사 속에서 시간을 정복하지 못한 군왕은 그들 신하의 종마( 種馬 )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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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자대학교 교수 정 윤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