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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관리자 | December 21, 2012 | view 9,322
28. 주인을 잃어버린 명품시계들 Part.1 
 
Part. 1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진열장에서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홀리는듯한 매력과 두려움, 그리고 호기심이 있었다. 왜 이 시계가 나를 멈추게 하였을까? 그냥 돌아설 수 없는 호기심에 한번 들어가서 만져나 볼까. 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아주 오래된 유리문을 밀쳤다. "저 - 저 시계는 어떤 시계인가요?" 질문을 하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카운터 매니저가 나를 겸연쩍게 한다.
 
시계를 꺼내는 모양세가 괜히 들어왔나 싶을 정도로 조심스러움이 많았다. 그는 나를 자꾸 보면서 시계를 양피 위에 가볍게 올려놓았다 섬세하면서 매우 노련한 장인의 솜씨를 뽐내며 시계는 내 앞에 그렇게 다가왔다.
 
Heavens light our guide(우리의 인도에 하늘의 빛을). 시계 뒤백에 푸른 바탕에 금으로 양각된 글씨 위에는 파티알라(Patiala) 왕국의 문장이 핑크골드와 은( 銀 ) 그리고 최고급 에나멜을 이용하여 아름답게 마크되어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다루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림 1] 파티알라(Patiala) 왕국의 문장이 핑크골드와 은( 銀 ) 그리고 최고급 에나멜을 이용하여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문장 밑에는 Heavens light our guide(우리의 인도에 하늘의 빛을)라는 글이 마크되어 있었다.
만지려는 순간 그는 조용히 말했다. "투엔티 화이브 싸우젼트를 달라."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감히 손을 델 수 없어서 멍하니 바라보는데 그가 시계를 뒤집어 놓았다. 전통적인 인도 왕의 복장을 한 카이절 수염을 한 근엄한 왕의 초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누가 보아도 뛰어난 장인의 솜씨로 그려진 에나멜 초상화였다. 이 작은 초상화가 지나가는 나를 바라보았나 보다. "1891년에 태어나 1938년 심장발작으로 사망한 인디아의 파티알라 왕입니다." 그러나 그는 왕의 이름을 묻자 그냥 파티알라 국왕이었다고 답을 할 뿐이었다.
 
두 시 방향의 누름 버튼은 이 시계가 리피터(Repeater)기능이 있다는 뜻이다. "리피터는 이상이 없는가?" 라는 질문에 그는 시계의 태엽을 감더니 시계를 12시에 맞추고 버튼을 누른 후 진열장 위에 놓았다. 경쾌하면서도 아름다운 3색의 음조로 시계는 타종을 하였다. 직경 50mm의 18금 헌터케이스(Hunter Case) 회중시계는 리피터 타종의 음향을 아무런 오염 없이 타종하고 있었다. 시계의 디자인과 제조 공정을 보니 1900년 경에 제조된 것 같았다.
 
"아름답습니다." 더 이상의 찬사를 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 이처럼 아름다운 시계를 자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파티알라 왕국의 유물이라면 아직 이 왕국이 인디아의 자치 토후국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할 텐데 왜 이 시계가 파티알라의 반대편인 미국 플로리다의 조그마한 도시의 진열장에 있을까? 아직 상당한 부를 누리는 토후국으로 존재하며 자신의 선대왕의 유물을 내다 팔아야 할 정도의 상황은 아닐텐데... 하는 생각이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그림 2] 1938년 47세의 나이로 요절한 파티알라 토후국의 왕. Bhupendra Singh(재위기간:1900-1938) 88명의 자녀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귀국 후 이국의 땅에서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던 초상화의 주인공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그 주인공은 인디아의 토후국인 파티알라의 22번째 왕으로 1900년 제위하여 1938년 심장발작으로 사망하였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4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명품시계의 주인은 이국의 땅에서 만난 동양의 한국인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분이었을까? 왜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을까? 후대의 왕의 자손은 이 시계를 먼 타국으로 왜 보내야 하였을까? 흠집하나 없이 완벽한 파티알라 명품 시계에는 시계의 주인이 또렷하게 그려져 있는데 슬프게도 주인은 없었다.
 
항시 아름답게 들렸던 리피터의 타종소리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 애절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 파티알라의 왕 브흐팬드라(Bhupendra)는 많은 활동을 한 인디아 토후국의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Khalsa College를 졸업하고 당시 인디아를 정복하였던 영국의 귀족들과 돈독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던 매우 활동적인 신세대 왕이었다. 더구나 그는 일곱 명의 자녀를 둔 유부녀와 간통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사생활이 매우 문란한 왕이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에 많은 친구를 두었지만 역설적으로 많은 적이 주위에 있었을 것이다. 88명의 자녀를 두었다는 기록은 확실한 것 같았으며, 요즘 세상에 두 명의 자녀를 낳아 기른다는 것도 벅찬 인생살이에 88명의 자녀를 두었다는 것은 그가 47세의 나이에 요절한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림 3] 내부의 기계는 1900년 경에 스위스에서 제작된 리피터 스탠다드형이며, 기계와 케이스 가장자리에는 2개의 리피터 공이 보이며 두 개의 햄머가 보인다.
물론 인디아 토후국의 왕이라면 그의 재정은 매우 넉넉하였을 것이다. 당시 최고의 시계인 리피터 시계에 왕국의 문장과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서 제작을 의뢰하였다는 것은 그가 매우 진취적이며 명예와 사치를 쫓는 왕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내부에 장착된 리피터 무브먼트는 전통적인 스위스 리피터 회중시계의 스탠다드형이였다. 시계의 탈진장치(Escapement)는 스위스에서 개발하여 현대 기계식 시계의 탈진장치의 기본이 되어버린 앵커탈진기(Lever Escapement)가 장착되어 있었으며, 크라운셋팅 메카니쥼은 이 시계가 1890년 이후에 생산된 제품이라는 중요한 증거이다. 전체적인 헌팅 회중시계의 케이스 구조와 크라운의 형태는 이 시계가 1900년 경에 제조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화려한 시계 외장에 비해 기계 내부에는 아무런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나에게 시계의 무브먼트에는 40개의 보석이 있다고 자랑하였다. 기계 내부의 공(Gong)을 보니 2음조의 타종이었다. 그런데 왜 3음조처럼 들렸을까? 사지도 않으려면서 다시 들어보자고 할 수도 없어 리피터 타종소리 확인은 포기하였다.
 
사진을 찍자고 하니 난색을 표한다. 물건을 사지도 않으면서 사진만 찍자는 동양인의 뻔뻔스러움에 기가 막혔을 것이다. 파티알라 시계의 옆에는 1690년 경에 영국에서 제작된 만두시계가 있었다. 필자도 한 점 소장하고 있으며, 밸런스 스태프 덮보석을 다이아몬드로 장착한 매우 희귀한 고전 회중시계였다. 이와 비슷한 시계를 필자는 진품명품 녹화 때에 보았다.
 
톱가수 태진아씨가 일본에 있는 그의 팬클럽 회장에게서 선물을 받았다는 회중시계이었는데, 영국의 천재시계사 리차드 간소니(Richard Ganthony)가 만든 회중시계였다. 1813년 런던 롬바르드 스트리트(Lombard St.) 49번 가에서 활동하던 중에 제조한 회중시계이었는데, 태진아씨의 시계에도 밸런스 스태프축의 덮보석으로 0.1캐럿의 다이아몬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리차드 간소니는 1820년에 계량식 온도계를 발명하여 벽시계의 하단 부에 장착하는 혁신적인 시계 제조인이며, 최초의 휠 바로메타(Wheel Barometer)의 발명자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당시로는 매우 시계를 잘 제조하였는데 유감스럽게도 간소니의 시계는 회중시계의 케이스를 거의 18금으로 제작을 한데다 그의 시계제조 역사는 아들이 1847년 아버지 간소니와 같은 해에 사망을 하고 두 명의 손자는 장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시계공으로서 손자의 대에서 시계기술의 대가 끊어졌다.
 
그래서 브랜드화되지 못하고 유명도를 잃어 수많은 유럽의 전쟁 중에 어려운 처지에 놓인 소장자들이 금케이스를 용해하여 처분하여 현재는 온전한 간소니 시계를 발견하기가 매우 어렵다. 다행스럽게도 가수 태진아씨가 감정 의뢰한 회중시계의 상태는 최상의 상태였다.
 
[그림 4] 은제품( 銀製品 )으로 된 시계 케이스에 푸른색과 회색의 상어가죽을 덮었으며 은으로 만든 문자판(Dial)에는 검은색으로 상감된 로마 숫자 사이에 프랑스 왕실의 문장인 붓꽃(Fleur)을 마크하여 300년 전의 디자인으로 보기에는 세련미가 넘친다.
이 만두시계의 상태도 매우 훌륭하였다. 이 시계의 케이스는 푸른색과 회색의 아름다운 색상의 조화를 이룬 상어가죽으로 덮여져 있었다. 은으로 만들어진 문자판의 로마숫자는 검은색으로 상감처리가 되어 있었으며, 로마숫자 중간 중간에는 1147년 이래로 프랑스 왕실의 문장인 붓꽃(Fleur) 모양이 마크되어 있었다.
 
당시에 유리가 발명되지 않아서인지 시계에 유리는 없었으며 시간 조절도 분침 중앙의 중심을 사각으로 연마하여 Keywind를 이용하여 조절을 하는 고전적인 방식이다. 은제품( 銀製品 )의 케이스에 상어가죽을 덮었다는 것은 이 시계를 만든 장인은 매우 품격 있는 고객으로부터 주문을 받았지 않았나 싶다.
 
의문시되는 점은 이때에 비록 시계에 유리가 사용되지는 않았으나, 고급품의 경우 천연 수정을 연마하여 시계유리로 사용을 하였는데 천연수정유리가 분실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운터 매니저는 "자신은 모르는 일" 이라고 부정을 하였지만 당시에 수정을 연마하여 시계유리로 사용한 시계를 필자는 소장하고 있다.
 
이 시기의 시계산업의 최강국은 영국이었으며, 당시 영국의 시계제조 기술은 현대의 시계사( 時計士 )들에게도 모범이 되고 있다. 정교한 연마와 세련미 그리고 부품 하나하나에 실려있는 정성은 그들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 60mm의 직경은 작은 편이었지만 40mm가 넘는 두께는 시계를 휴대하기에 매우 불편하였으리라. 현대의 일본인들은 이 시계의 크기와 여러 겹의 케이스를 빗대어 만두시계라는 애칭으로 불러주고 있다.
 
블루와 회색의 상어가죽과 은색의 바탕에 상감된 검은 로마숫자와 붓꽃문양이 흠잡을데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가격을 물었더니 8,000불이라고 한다. 놀라는 필자에게 그는 만두시계의 특징인 6시 방향의 버튼을 누르면서 내부의 기계를 보여주려고 한다. 물론 내부의 기계는 당시 최상의 기술이며 전설인 휴즈 무브먼트(Fusee Movement)일 것이다.
 
[그림 5] 밸런스 스태프 중심에 안착된 0.1캐럿의 다이아몬드도 놀랍지만, 밸런스 덮판에 당초문양을 투각하여 밸런스의 운동을 환상적으로 보이게 한 영국 시계사들의 세련미를 볼 수 있다.
시계를 열자 놀라운 것은 밸런스 스태프 덮보석 자리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였다. 약 0.1캐럿의 다이아몬드는 브릴리언트 컷트를 뒤집어 놓은 상태였다. 다이아몬드의 테이블 면을 덮보석의 내면( 內面 )으로 사용하였으리라 생각되었다.
 
밸런스 아암의 운동이 환상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밸런스 덮판에 당초문양을 투각하여 시계가 진동할 때마다 당초문양 사이사이에서 밸런스 아암의 움직임이 마치 이 시계의 심장이 박동 하는 것 같아 환상적이다. 고개를 옆으로 숙여 기계 내부를 보니 이 시계 역시 당시 시계기술의 전설이라고 칭송되는 휴즈(Fusee)장치가 마치 이집트 사막에 당당하게 건설된 피라미드처럼 설치되어 있었다.
 
300년이 지난 시계임에도 시계의 진동소리는 힘차게 박동 하였으며 내부의 무브먼트 어느 한곳에도 흠잡을데가 없는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기계식 시계의 위용을 한껏 자랑하고 있는 명품시계였다. 시계에 대하여 너무나 박식한 매니저인지라 "누가 사용한 시계인가?" 라고 물었더니.
 
난색을 표한다. 유감스럽게도 이 시계는 소장자와 시계를 제조한 시계사를 추적할 수 있는 기록들이 매우 빈약하였다. 영국의 시계사들은 반드시 제조자의 기록과 제조자가 활동했던 지역을 시계의 무브먼트에 자세하게 기록을 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시계에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영국 런던의 한 거리인 Mat & Tho Dutton London No.1539 라는 기록만 있으니. No.1539는 시계사가 시계를 제조한 이래 이 시계가 1539번째라는 기록이라. 시계사를 추적하는 것은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러나 1687년 에드워드 바로우(Edward Barlow:1639-1719)와 다니엘 콰르(Daniel Quare:1648-1724)에 의해서 리피터 회중시계가 만들어진 것을 생각해볼 때 그들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계에는 단음조의 리피터 기능이 장착되어 있었으며, 초기의 리피터 음향의 소리가 궁금하였으나 갑자기 어느 친구의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그만두기로 하였다.
 
그 친구는 어릴 적에 첫사랑 이야기를 자주 하였는데 아마 그의 기억에 매우 아름다웠던 첫사랑이였나 보다. 오랜 기간 꿈처럼 달콤한 첫사랑을 간직하였으나 우연히 고향에 친척의 혼례식에서 어린 시절의 첫사랑과 마주치고서는 항시 꿈처럼 달콤한 첫사랑의 기억이 무참하게 사라져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에 시계를 연구한 필자로서는 초기의 리피터 음향을 상상의 환청에 맡기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아 포기하였다.
 
[그림 6] 1995년 시카고 한 일반 빈티지점에 전시되었던 티파니 회중시계. 그러나 이 시계의 주인은 전통적인 미국인이었으며 학자이고 군인이며 교육자였다.
100년 전 인디아 토호국의 왕인 파티알라의 시계와 이 이름 모르는 300년이 지난 명품 리피터 회중시계를 보는 필자는 만감이 교차한다. 100년도 못사는 인생을 살아가는 삶들이 한때 이들의 주인이 되었으나, 그들은 잠시의 세월 후 또 다시 이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시계점 진열장에서 또 다른 주인을 기다리며 세월을 매김질하고 있었다. 이들이 또 다른 주인 만난다하나 그 새로운 주인이 진정 이 명퓸시계의 주인인 것인가...
 
히스토리(History)가 없는 시계도 히스토리가 있는 시계도 모두가 변할 수 없는 영원한 주인은 존재하고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25,000달러를 요구하였던 파티알라 시계가 소장자였던 브흐팬드라(Bhupendra)왕에 관한 자세한 히스토리가 함께 하고 있었다면 이 시계의 가치는 과연 어떻게 평가가 되었을까. 이국의 필라델피아의 한 소도시에서 만난 주인을 잃어버린 명품시계들을 만나고 보니 얼마 전 우연히 마주친 또 다른 주인을 잃어버렸는데도 주인을 잊지 않았던 한 평범한 시계가 생각이 난다.
 
95년 미국을 방문할 때 시카고의 한 빈티지점에 전시되었던 18금 케이스의 티파니(Tiffany) 회중시계가 생각난다. 매우 단순하면서도 아무런 기능도 없었으며 그저 전통적이며 스탠다드한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티파니 회중시계의 가격은 놀랍게도 12,000불이라는 금액이 써져 있었다. 무슨 특별한 기능이 있는가? 하는 필자의 궁금증과 기대감을 일시에 무너뜨렸던 이 시계는 그저 단순한 회중시계였다.
 
세라믹 처리된 백색의 문자판과 로마숫자 그리고 흔히 만날 수 있는 헌팅 케이스와 시계바늘을 움직이는 기능 이외는 아무런 기능은 없었다. 다만 시계 뒤백에는 소장자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시계였다. 그러나 상점의 주인은 이 시계를 사용하였던 소장자의 역사를 자세하게 알고 있었으며, 소장자이었던 분의 기록을 상당량 보관하고 있었다.
 
[그림 7] Frank Royer Keefer Tiffany Pocket Watch의 뒤백에는 Keeferr 가문의 문장이 각인되어 있었다. 이 시계는 이 문장 이외는 특별한 사항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 티파니 회중시계의 소장자는 1865년 10월 10일 미국의 펜실베니아(Pennsylvania)의 Benango County에서 장로교 종교의 군인집안에서 태어났으며, 1954년 3월 15일 Walter Reed Hospital 병원에서 9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는 역사를 자세하게 기록된 자료로 보여주고 있었다.
 
소장자인 Frank Royer Keefer는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펜실베니아 주립병원에서 근무하기도 하였으며, 미국과 스페인 전쟁 중에 군의관으로 복무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1910에서 1914년에는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에서 육군준장으로 군의관을 양성하기도 하였다는 기록과 시계 소장자인 Frank Royer Keefer가 생전에 여러 나라에서 생활하였던 모든 기록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평범한 이 시계의 가치를 높인 것 같아 이전에 필자가 사귀었던 장로교 집안에서 교육을 받은 미국인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
 
처음 그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에 커다란 사진첩을 여러 권을 꺼내와서 필자의 가족에게 자신의 가문의 내력을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두세 시간을 브리핑을 하였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아서 이들은 이러한 가문에 관한 설명을 매우 재미있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당시에 무척 부러운 생각이 들었으며 미국인들의 문화에 큰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시카고의 빈티지 상점의 티파니 시계가 필자에게는 전형적인 미국인의 문화를 접해보는 중요한 경우였다. 아무런 특징도 없으며 단순히 티파니라는 명함 하나만 있었던 회중시계는 소장자의 장구한 히스토리로 인하여 시계의 가치는 필자의 판단으로는 약 12배의 가치가 상승하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었다.
 
골동품이라면 특정한 인물이 연관지어져야 하며 명품이라면 특수한 기능, 또는 고가의 보석들이 세팅되어 있어야만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완전하게 무너뜨린 경험이었다. 왜 이 시계가 별로 특별하지도 않으며 인류 역사의 기록에 전혀 기록되지 않은 보통사람이 사용하였는데도 그의 즉 소장자의 히스토리가 존재한다고 하여 명품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으며, 그에 따른 10배 이상의 금전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분명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선진국과의 문화적 차이가 있을 것이다.
 
오래 전 TV의 한 프로에 코미디언 김병조씨가 출연을 하여 그의 집안의 족보를 설명하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정신세계가 남다르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기 전 자신의 집안 내력을 타인에게 자신 있게 논리적으로 설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평소 그의 정신세계의 뿌리가 튼튼하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그림 8] Frank Royer Keefer Tiffany Pocket Watch의 내부 기계이다. 그저 시간을 움직이게 하는 윤열과 조속장치 이외는 특별한 기능은 없었다.
비록 시카고의 티파니 시계는 Frank Royer Keefer가 구입할 당시에는 파티알라(Patiala) 리피터 회중시계보다도 런던 리피터 회중시계보다도 한참 낮은 가격에 구입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파티알라 시계처럼 주인을 잃어버리고 비록 소장자의 사진이 선명하게 시계에 그려져 있다 하여도 주인에 관한 기억도 잊어버렸으며...
 
화려한 상어가죽을 입은 런던의 리피터 회중시계도 8,000불이라는 고액의 가치가 부여되었어도, 필자의 판단으로는 명품으로서 영혼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현대인들은 명품이라는 단어에 환호하고 명품이라는 상품에 매력을 찾고 있으나 진정한 명품은 우리 현대인들은 절대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명품은 어느 특정 기업이 마케팅 전략으로 만들 수도 없으며 뛰어난 장인이 혼신의 정성을 다하여 만들었다하여 명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명품은 오직 긴 세월과 유행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모양세와 자신을 만들어준 장인의 혼과 정열을 잊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였던 소장자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야 하며 후대의 매니아들에 의해서 인정을 받아야만 이 진정한 명품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릴 적 우리를 키워준 어머니처럼 하얀 광목저고리에 몸빼바지를 입은 우리들의 어머니와 같은 티파니 시계의 가치를 만나보았다.
 
[그림 9] Frank Royer Keefer Tiffany Pocket Watch에는 평소 소장자가 사용한 애장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얀 광목저고리에 몸빼바지의 우리들의 어머니와 비교되는 명품은 이 세상에 또 다시 없듯이... 주인을 잊지 않고 있는 Frank Royer Keefer Tiffany Pocket Watch의 명품으로서 가치의 진정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위대한 우리 고구려 역사를 노략질 당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의 역사를 도적질 당한 후의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들을 진정 명품조상으로 평가를 해줄까?
 
오늘 우리들은 명품의 홍수에 휩쓸려 살아가는 풍요로움 속에서 Frank Royer Keefer Tiffany Pocket Watch와 같은 평가를 얻어내기에는 진정 어려운 일인가...
 
아니면 먼 훗날 후손들이 평가하기를
 
" 그들은 명품이 넘치는 시대에서 고품질의 삶을 추구한 것 같은데.
참 아이러니 하다. "
 
라고 할 것인가....
 
Part. 2에 계속...
 
American Certified Master Watchmaker
대한민국 명장
고급 시계사
시계 산업기사
부산여자대학교 교수 정 윤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