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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관리자 | December 21, 2012 | view 8,403
29. 주인을 잃어버린 명품시계들 Part.2 
 
Part. 2
 
주인을 잃어버린 명품시계 중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Russian Imperator Aleksandr:1775-1821) 시계가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매우 이례적인 시계이며 러시아를 통치하였던 15대 챠르의 시계라고 생각하기에 매우 초라한 시계였다.
 
시계의 형태와 무브먼트의 구조 등을 보아서도 알렉산드르 1세의 시기와 같았으며, 알렉산드르의 초상화가 시계 문자판에 에나멜을 이용하여 정교하게 그려져 있어서 러시아 15대 챠르인 알렉산드르의 시계임은 틀림이 없었다.
 
[그림 1] 러시아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그림이 시계 문자판에 에나멜을 이용하여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전쟁 중에 경건주의적 신비주의( 敬虔主義的神秘主義 )에 사로잡혔던 황제라는 기록이 있으며 여행 중 갑자기 암살 당한 비운의 황제이다.
알렉산드르 황제의 삶 자체도 시원찮은 삶이었지만 시계마저 보관상태가 좋지 않아서 명품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울 정도의 시계상태는 안타까웠다.
 
그의 죽음이 천수를 다하지 못한 암살이였으며, 그의 아버지인 파벨 표트르비치 로마노프(Paul Petrovich Romanov:1754-1801) 역시 부인인 소피아 프리드리카 아우구스타(Sophie Fredericke Augusta)가 남편인 표트르 3세의 6촌인 세르게이 유스포프 후작과 바람을 피워 남편인 파벨 표트르비치를 살해하였으며, 알렉산드르의 아버지인 파벨 역시 누가 자신의 친아버지인가에 대한 출생의 비밀로 항시 괴로워한 황제이자 그 역시 암살 당한 비운의 황제이었다.
 
아버지에 이어서 2대째 암살이라는 비운을 격은 황제의 시계이어서인지 가격도 시원치 않았으며, 매니저의 이야기로는 소장자이었던 황제의 이야기를 하면 구매자가 관심을 가졌다가도 외면을 하여 도대체 구매자를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시간을 내어서 인터넷 경매에라도 올려서 처분을 해야겠다고 하는 등 매니저 자신도 알렉산드르 시계에 애정을 주지 않고 있어서 필자는 이 시계가 새로운 주인을 만나기는 매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스의 재질도 제국의 황제의 시계라기에 너무 초라한 은( 銀 )제품이었으며, 시계 제작자의 기록도 없으며, 시계 케이스 백에는 생소한 토리아스(Torias)라는 문구와 13개의 루비를 사용한 제품이라는 것. 그리고 1800년 경에 가장 많이 사용된 바 무브먼트(Bar Movement)가 장착되어 있어서 당시 러시아 황실의 재정을 의심하게 하는 시계였다.
 
[그림 2] 알렉산드르 시계에는 1800년 경에 가장 많이 사용된 바 무브먼트가 장착되어 가치를 낮추는 요인이 되었다.
소장자이었던 알렉산드르황제는 전쟁 중에 경건주의적 신비주의( 敬虔主義的神秘主義 )에 빠져서 전쟁 후에도 이 신비주의에 사로잡혀 국정을 혼란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의 일생이 여느 황제처럼 화려하거나 명료하지 않아서인지 시계마저 귀신이 붙은 시계인 것 같아 필자도 꺼림칙하였으나 그래도 시계의 역사에 기록될만한 이야깃거리는 되겠다 싶어서 사진을 찍었는데 귀국해 필름을 보니 핀트가 잘 맞지 않는 등 매우 실망스러웠다.
 
제국을 호령하였던 황제의 시계였으나 황제는 제위기간 동안 국민으로부터 존경받지 못하고 암살에 의해 요절한 제왕의 시계는 이국의 땅에서 버림받고 있으니 이 시계의 운명도 주인의 운명과 같이 될 것 같아 안타까웠으나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소장자의 운명에 따라서 애장품인 명품시계도 한 순간에 후대의 시계 매니아들에게 명품시계로 찬사를 받거나 버림을 받는가 보다. 만일 이 시계가 동시대의 천재시계사이며, 근대시계의 아버지인 브레게의 작품이었다면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다. 소장자인 알렉산드르의 비운으로 가득한 운명적인 삶들이 브레게의 작품이라는 사실 하나로 신비한 삶으로 스토리는 미화되어 시계는 명품으로서 포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알렉산드르의 시계는 후대의 시계인들과 매니아들이 그의 시계를 명품시계의 위상에 올려놓을 수 있는 이야기 거리를 단 하나도 만들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으며, 시계 역사에 기록된 시계사의 작품도 아닌 상태이었으니 그의 애장품인 시계마저 비운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림 3] 에드워드 베이커가 1836년 그의 전성기에 제작한 3음조의 리피터 회중시계이다. 18금 문자판의 디자인이 고전적이며 화려한 그림이 마크되어 있다.
그러나 동시대인 18세기 후반에서 19세게 중반에 이르기까지 시계의 메카는 당연히 영국 런던이었다. 당시 영국 시계사들의 작품은 현대인들도 경탄할 정도의 수준이었으며 또한 그들의 시계의 역사에 관한 기록도 크게 평가를 할만하다.
 
1840년에서 1851년 사망할 때까지 펜턴빌(Pentonville) 교도소 소장으로 근무하였던 에드워드 베이커(Edward Baker)는 1836년 엔젤 테라스(Angel Terrace)라는 15분 분할시간을 알려주는 3음조의 리피터(Three Duplex Repeater) 회중시계를 제작하여 세상에 남겼다. 이 시계의 직경은 겨우 50mm이었으며, 두께는 약 12mm 정도의 초박형 회중시계였다.
 
보통 리피터의 음조를 3음조로 제작하려면 두 개의 공이 필요한데 그는 한 개의 공으로 해결을 하였으니 에드워드 베이커의 기술력은 가히 경탄할만하다. 시계의 문자판은 18금을 두 개의 색상으로 패턴을 잡아 처리를 한 후 로마숫자로 시간 표시를 하였다. 이 시계의 특이점은 문자판에서도 나타난다.
 
보통 시계의 초침은 6시 방향으로 설계를 하는데 이 시계의 초침은 3시 방향에 설계를 하여 에드워드 베이커의 독창성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문자판의 디자인을 보면 문자판은 베이커의 작품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이것은 필자의 사견이지만 베이커 시계의 문자판의 디자인은 문자판만을 전문으로 제작한 전문가의 솜씨가 보인다.
 
물론 당시의 시계사들 중 문자판을 직접 제작을 하였던 시계사들도 많았으나 고가의 고급품을 제작하였던 시계사들은 문자판 제작을 전문가에게 의뢰를 하였다. 에드워드 베이커의 문자판도 이런 전문성이 보인다.
 
그것은 여느 시계의 문자판보다 장인의 숨결이 많이 느껴지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이 시계의 케이스는 18금을 주물로 부어서 만든 것이 아니다. 당시에 매우 어려운 공정이며 많은 시간을 들여야하는 금속판을 가공하여 제작한 케이스이다. 도대체 에드워드 베이커는 이 시계를 누구에게 주문을 받아서 많은 공을 들였을까? 내부에 장착된 무브먼트(Movement)는 이중탈진기가 장착되어 1800년대 초기의 작품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중탈진기 무브먼트는 스위스 시계사들도 제작을 많이 하였으나 영국의 시계사들에 비해 그 수준이 너무나 차이가 있다. 무브먼트에 설계된 리피터 기능은 베이커가 천사가 테라스에서 연주를 하고 있다고 명명한 3음조의 기능이 170년이 지난 오늘에도 아름답게 연주되고 있었다.
 
[그림 4] 에드워드 베이커의 리피터 회중시계의 무브먼트 내부이다. 한 개의 공에 두 개의 해머가 강약을 조절하며 3음조의 음향을 연주한다.
이 리피터 기능은 최상급의 수준인 1/4 시간타임을 알려주는 작동을 하며, 한 개의 공으로 3음조를 연주하고 있으니 당시 영국의 금속공학의 수준이 부럽지 않겠는가...
 
태엽덮개(Mainspring Cover Bridge)에 쓰여진 No.1105의 번호는 베이커가 이때까지 1100개가 넘는 시계를 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시계의 역사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시계사의 작품이 이러한데 당시의 천재적이라고 칭송된 시계사들의 수준을 가늠하기가 어렵지 않는가. 더구나 베이커의 시계는 두께가 12mm 정도이며 직경 또한 50mm인 것을 보면 그의 시계제조기술은 현대의 시계제조인들의 귀감이다.
 
이 시계는 1844년 쟌 아드리안 필립(파텍필립 시계의 정신적이며 기술력의 창시자)에 의해서 용두(Crown) 일체형(시계의 태엽감기와 시간조절 장치를 용두 하나로 해결하였음) 시계가 개발되기 전의 형식이므로, 시계의 태엽감기와 시간조절은 별개의 키(Key)를 이용하여 태엽감기와 시간조절을 할 수 있다.
 
이중의 덮개로 만들어진 케이스 뒤백의 세컨드 백에 있는 두 개의 구멍 중 중앙은 시간 조절용이며 아래쪽 7시 방향에 있는 홀은 태엽을 감을 수 있는 구멍이다. 18금을 얇게 가공하여 만든 두 개의 커버(Cover)는 방진을 위하여 정교하게 제작이 되어있다.
 
[그림 5] 에드워드 베이커의 회중시계의 케이스 뒤백 면에는 시계의 태엽감기와 시간의 조절을 위하여 키(Key)를 삽입할 수 있는 두 개의 홀이 있다.
문자판을 보호하는 유리를 감싸고 있는 베젤캡(Bezel Cap)은 성인이 손톱으로 가볍게 열 수 있게 제작이 되어 있으며, 시계 전체의 구조는 오픈 페이스형(Open Face Pocket Watch)으로 분류한다. 이때에 시계의 유행은 헌터 케이스가 압도적인 유행이었는데 베이커는 누구를 위하여 당시의 디자인과 비교되는 파격적인 디자인의 시계를 제조하였을까? 유감스럽게도 주문자를 추적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가 없으며 시계의 유통 과정도 오리무중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영국의 시계사 중에 에드워드 베이커라는 천재 시계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서 이 시계는 시계의 제작자와 시계의 혁신적이며 아름다운 디자인, 그리고 놀라운 3음조의 리피터 기능이 명품시계로서 그 품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림 6] 1880년 스위스에서 제작된 캬리용 챠임 리피터 회중시계이다. 두 개의 초침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시계의 메카가 영국에서 프랑스, 그리고 스위스로 옮겨지면서 1880년 스위스 시계 산업에서는 아름다운 음향을 연주하는 캬리용 챠임 리피터(Carillon Chimes Repeater) 회중시계를 제작하였다.
 
이 시계는 18금 케이스에 헌터 케이스(Hunter Case)로 제작을 하였으며 시계의 직경은 54mm이다. 시계의 구조 중 태엽을 감아주며 시간을 조절하는 용두(Crown)가 있어서 용두 일체형이긴 하나 당시의 기술개발이 용두를 잡아당기는 메커니즘(Mechanism) 기술이 개발되지 않아서 시계의 4시 방향에 올리브버튼이 있다.
 
이 올리브버튼을 누르면서 용두를 회전하면 시간을 조절할 수가 있어 초기의 용두일체형의 시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시계 문자판을 보면 중앙에 초침이 있으며 6시 방향에 또 하나의 전통적인 작은 초침이 있는데, 두 개 모두 다 초침 기능 이외의 별다른 기능은 없어서 아쉬움이 있다.
 
필자는 처음 두 개의 초침(Second Hand)을 보고 크로노그래프 기능과 리피터 기능이 있는 최상의 기술이 집약된 회중시계인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크로노그래프 기능을 조절하는 보조 버튼이 없어서 매니저에게 왜 두 개의 초침이 있는가 하고 질문을 하니 그도 매우 겸연쩍 하면서 6시 방향의 초침은 보조초침(Subsidiary Seconds Hand)이라고 말해 주었다.
 
아마 특별한 기능이 아닌 것이어서 그도 겸연쩍은 웃음을 흘렸나보다. 필자는 최초의 중앙 초침방식의 시계인 1820년 제품 보붸(Bovet) 시계를 소장하고 있는데 초침을 중앙으로 설계한 최초의 휴대용 시계이었으나 윤열의 감속이 해결되지 않아서인지 시계의 태엽은 하루 2회의 태엽감기를 하여야 하는 시계였다.
 
그러나 이 캬리용 챠임 리피터 시계의 윤열은 다섯 개의 윤열 감속장치가 해결된 방식이어서 한번의 태엽감기로 36시간 이상을 작동하였으며 가끔 작동을 시켜주는 리피터의 기능도 충분하게 해결하고 있었다. 캬리용 챠임 리피터의 특징은 다양한 음계(Various Tones)를 만들 수 있어서 한 소절의 음악을 충분하게 해결을 할 수 있는 음계가 확보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정한 음계 4개로 불멸의 챠임곡인 웨스터 민스터(West Minster Temple)챠임을 연주할 수 있다.
 
[그림 7] 1880년 제작된 캬리용 챠임 리피터 회중시계의 무브먼트다. 복잡성과 다양한 음계를 보유하고 있어서 리차드 길버트는 이 시계를 명품시계로 평가하였다.
시계의 문자판은 세라믹이며 네 개의 바늘은 탄소강으로 제작되었다. 장착된 무브먼트는 캬리용 챠임 리피터 기능을 해결하기 위해서 매우 복잡한 기능이 설계되어 있다. 또한 이 기능을 오랜 기간동안 유지하기 위해서 38개의 보석을 채용하였는데, 단 두 개의 공으로 4음계를 해결한 것은 에드워드 베이커의 엔젤 테라스 공(Angel Terrace Gong) 기술을 볼 때에 당시에는 어려운 기술은 아니었을 것이다.
 
캬리용 챠임 리피터 메커니즘에는 크고 작은 라체트 기어(Ratchet Gear)가 여러 개 보이는데, 이 라체트 기어는 근대시계의 아버지 브레게가 발명한 기어이다. 필자도 많은 리피터 시계를 보았으나 이처럼 복잡한 리피터 기능은 처음이었다.
 
얼마전 스위스의 어느 시계 업체에서 자동으로 1/4 시간 챠임이 울리면서 리피터 기능을 수행하는 손목시계를 개발하여 올해에는 시장에 내놓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물론 벽·탁상용 시계에는 오래 전에 자동으로 1/4 챠임 시계가 만들어 졌으나 소형 손목시계에 두 가지 기능 모두를 첨가하였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그림 8] 더들리 매소닉 모델 2(Dudley Masonic Pocket Watch Model 2) 회중시계이다. William Wallace Dudley가 69세에 창업을 하여 시계의 무브먼트를 독특하게 제조하였으며, 모델 1은 1400개를 제조하였으며 모델 2는 2800개를 제조하였다. 모델 1의 경우 회사가 1922년 시계생산을 시작하여 1924년 막대한 빚으로 인하여 1925년 파산신고를 한 불행한 시계인의 작품으로 인한 희소성으로 그 가치가 인정된 명품시계이다. 다음 호에 이야기하겠다.
캬리용 챠임 리피터 시계의 윤열은 전통적인 시간윤열을 채용하고 있었으며, 탈진 장치는 현대의 기계식시계 탈진장치의 기본이 되어버린 스위스 앵커 탈진장치가 장착되어 있어서 이 시계의 수명은 매우 오래갈 것이라고 생각된다.
 
110년이 지난 지금에도 시계의 상태가 너무 훌륭하여 유럽인들의 시계 사랑의 척도를 가늠할 수 있다. 방대한 국토의 황제의 시계라 하여도 소장자의 삶이 명료하지 않을 경우 황제의 시계라 하여도 천대를 받고 있으며, 어느 이름 모르는 역사의 뒤안길의 신사가 사용한 에드워드 베이커의 시계는 시대를 뛰어넘는 장인정신과 리피터 기능으로 시계를 명품으로 평가되게 하고 있다.
 
소장자도 제조자도 알 수 없는 캬리용 챠임 리피터 회중시계는 특출한 음계의 연주를 할 수 있는 기능으로 인하여 최고의 골동품시계 평가사 리차드 길버트(Richard E. Gilbert)에 의해서 명품 시계로 평가되어 100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위용을 한껏 뽐내고 있다.
 
그러나 최근 우리의 시계 시장의 현실은 어떠한가... 국내의 한 수입시계업자의 이야기를 빌리면 국내 정상급의 재벌 회장님이 자신의 매장을 찾아와서 "나에게 권할만한 최상급의 시계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명품의 반열에 있는 브랜드의 리피터 시계를 권하면서 리피터 기능을 설명을 하였더니 재벌 회장의 최종적인 평가는 "이거 장님시계 아니야." 라며 그냥 나가더라는 것이다.
 
그는 필자에게 "국내 최정상의 시계학자로서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하여 필자를 당황하게 한 기억이 있다. 그의 이야기로는 일찍이 정상급의 시계가 어떤 시계인지를 국내의 소비자들에게 홍보와 정보를 전달하였다면 최상의 시계로 평가되는 리피터 시계를 국내의 재벌 오너가 장님시계로 평가절하하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누구의 책임인지 아직 필자는 알 수 없으나 필자의 소견으로는 모든 기성세대의 시계인들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 우리의 위치는 어디에 있으며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세계 3위의 명품시계 소비국으로 만족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명품시계을 제조하는 명품국으로 평가되는 날은 언제쯤인가...
 
하기야 70년대 세계 최대의 시계 생산국 일본은 100년의 시계 역사에서 단 한 개의 명품시계를 만들지 못하였으니...
 
우리가 명품시계 생산국 반열에 오른다는 것 또한 꿈으로 희망사항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갈 길이 멀고 먼데 해는 왜 서산에 걸려있는가...
 
American Certified Master Watchmaker
대한민국 명장
고급 시계사
시계 산업기사
부산여자대학교 교수 정 윤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