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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관리자 | December 21, 2012 | view 10,185
30. 뚜루비용 「TOURBILLON」 Part.1 
 
Part. 1
 
필자가 처음 뚜루비용(Tourbillon)이라는 단어를 알게된 것은 1969년 경에 한 외국인에 의해서였다. 그는 처음 필자에게 시계를 수리한 후 두어번 시간 조정을 하기 위해 방문을 하였다.
 
그는 마치 한국인처럼 우리말을 잘 하였는데 농담뿐 아니라 우리들의 속담과 음담패설도 마치 우리들처럼 하는 한국인 같은 외국인이였다. 매우 조심스러운 분이었는데 필자의 기억으로는 프랑스인이 틀림이 없었다.
 
[그림 1]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초기의 버지탈진기를 재현한 모든 부분품이 나무로 제작된 탁상형 시계이다.
처음 그의 시계를 수리할 때 그는 내일 오라는 필자의 간곡한 부탁에도 수리하는 것을 보고 싶다며 굳이 시계를 분해 소제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었다.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의심을 하는가보다 하는 생각에 그냥 수리하는 것을 옆에서 보는 것을 허락하였고, 한시간이 넘는 시간을 지켜보다가 하루 조정을 해보아라 는 말을 남기고 이틀 후에 다시 방문을 하였다. 그 후에도 시간이 조금 빠르다며 두 번을 더 방문을 하였다.
 
마지막 방문에서 기계시계의 오차와 자세차를 설명하는 필자에게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도 매우 조심스럽게 "뚜루비용" 이라는 단어를 질문하였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필자에게 그 분은 진지한 얼굴로 한번 알아보아라 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 후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필자는 "뚜루비용" 이라는 시계 브랜드가 있는가 보다 라는 생각에 여러 선배들에게 질문을 하였으나 아무도 대답을 해주지 못하였다. 그러다 1970년 서울에서 시계인 생활을 할 때에 필자가 근무하는 매장에 많은 외국인들이 방문을 하였는데 특히 일본인들의 방문이 많았었다.
 
하루는 매장에서 새로 출시된 드레스 벽시계(태엽으로 작동을 하는 진자시계. 한번 태엽 감기에 30일 작동)를 진열하고 있는데 뒤에서 일본인의 음성이 들렸다. "스미마센" 하는 소리에 "메이 아이 헬프유" 하는 필자를 50대 중반의 신사는 가벼운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필자는 급히 일어를 잘하시는 사장님을 호출하였으며 두 분의 대화를 듣는 둥 마는 둥 당시에 캘린더 기능이 첨가된 드레스 벽시계 진열을 하였다.
 
일본인은 떠났으며 매장을 나가는 일본인에게 사장님은 "미친놈" 하는 것이었다. 좋은 대화가 아니었나 보다 하는 생각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는 필자에게 "저 놈 미친놈 아니야." 하시며, 지금 진열 중인 이 드레스 시계의 날짜가 2월 28일이 되고 난 후에 3월 1일로 자동으로 바뀌느냐고 물으면서 일본제품의 시계에는 그런 기능이 있다고 하더라며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냐. 미스터 정." 하는 것이었다. 필자도 "그런 시계가 어디에 있어요." 하며 맞장구를 쳤다.
 
참고로 당시에 국산품 드레스 벽시계의 날짜 기능은 31일이 지나면 32, 33,····39, 0, 1, 이렇게 바뀌어서 매월 첫째 날이 되면 캘린더 기능을 1일로 조정을 하여야 하였다.
 
[그림 2] '발명왕' 에디슨(Thomas Edison:1847-1931)에 의해서 1883년 백열등으로 시작되어, 에디슨 효과에 주목한 영국의 존 플레밍에 의해서 발명된 진공관을 사용한 1930년 경에 제작된 디지털 시계이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기라도 한 것인가, 2개월인가 지났을까... 그 일본인이 다시 방문을 하였다. 그 날은 월요일 아침인 것으로 기억이 난다. 시계를 수리하고 있는 필자에게 다가오는 신사 분은 그때 그 일본인이였다.
 
필자는 "소 소 오마찌 구다사이" 하며 휴게실에서 다른 매장의 사장님들과 모닝커피를 즐기고 있는 사장님에게 전화를 하였다. "그때 사장님이 미친놈이라고 한 일본인이 다시 방문을 하셨는데요..." 하는 필자에게 "내가 왜 가." 하시며 오지 않으려 했으나 일어를 모르는 필자 때문인가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면서 출입문을 들어서고 계셨다.
 
반가워하지 않는 우리들 앞에서 그의 가방에서 꺼내는 작은 탁상시계는 내가 그때 처음 만나는 LED 디지털 탁상시계였다. 그는 전원을 꽃아 보라고 하면서 일본은 50Hz이며 한국은 60Hz이니 시간은 맞지 않을 것이다 하며 시계의 기능을 설명하였다.
 
붉게 빛나는 LED 디지털 글씨체도 매력적이였지만 놀라운 것은 30일에서 다음달 1일로 변환하며 2월 28일에서 3월 1일로 날짜가 바뀌는가하며, 4년마다 있는 윤달인 2월 29일도 기억하는 당시로서는 첨단의 시계였다. 필자도 당황하였지만 사장님의 당황스러움은 매우 컸던지 그 일본인이 떠난 한참 후에도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내가 이러고서도 서울 한복판에서 시계장사를 한다고 하는가." 독백하는 그의 한숨섞인 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돌고 있다. 그리고 필자는 우연히 만난 일본인 시계인에게 고려청자의 재현품을 선물을 하고서 돈은 지불을 할테니 일본에 시계에 관한 좋은 책이 있으면 이번 고향 방문 후 귀국 길에 사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공부를 하여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런 시계가 어디에 있어요." 하며 맞장구를 쳤던 필자의 우매함과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안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만세 삼창을 한 촌놈 그 자신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 일본인이 일본으로 간 후에 그의 주변의 친구들과 우리들의 이야기를 술잔의 안주거리로 삼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치 나라를 통째로 팔아먹은 매국노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개새끼", "굳이 시계를 가져와서 확인까지 할게 뭐야." 그 날 저녁 사장님과 필자는 명동의 한 술집에서 소주를 들이키며 통행금지가 지난 줄도 모른 채 그 일본인을 소주잔과 함께 으깨고 있었다. 처음 미친놈이라고 평가되었던 그를 이제는 개새끼라며 우리는 이를 갈고 있었다. 시계인으로 정말 자존심 상하는 경험이였다.
 
[그림 3] 1800년 뚜루비용을 발명한 근대시계의 아버지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부탁한 일본의 서적 몇 권이 도착을 하였고, 그 책에서 뚜루비용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고서 다시 한번 무지한 우리들의 현실에 충격을 받았었다. 일본 책에는 '쓰르비롤'이라고 적혀 있어서 한참을 헤맨 후에 일본어에는 뚜루비용이라는 표현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영어권에서는 '토빌론'이라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미 이 장치는 1800년에 개발되었다는 것이 또한 충격이였다.
 
그 후 필자가 다시 이 뚜루비용이라는 단어를 우리나라 시계인들에게서 만난 것은 그때 그 일이 있은지 36년이 지난 2002년 1월 15일 필자의 홈페이지의 게시판에 질문을 받고서다. 무척이나 반가운 단어였다. 그래 우리가 이제서야 이 시계의 장치에 소비자가 관심을 갖는 것인가...
 
시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 중에 하나라는 이 장치가 아브라함 루이스 브레게가 발명한지 202년이 지난 후에야 우리가 이 장치에 관심을 갖는 것에 필자는 감회와 함께, 우리가 이제야 이런 고급 시계를 평가하고 구매할 수 있는 부자 나라가 된 것이라는 기쁨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 시계를 수입을 한 매장도 구매를 하였다는 고객도 누가 이 시계를 사용하고 있다는 소식도 필자에게는 들리지 않았으며 알 수도 없었다. 가끔 전화와 인터넷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내용을 접해 보았으나 내용상으로는 진품이 아니라는 판단이었으며 그들의 희망사항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림 4] 브레게가 발명한 뚜루비용의 케리지를 현대의 시계 제조사가 개량한 뚜루비용 케이지이다.
그러나 얼마전 한 고객이 찾아와서 뚜루비용을 구매하겠다며 상세한 상담을 하고 갔는데 지금 이때에 뚜루비용 시계장치의 원리에 대하여 자세한 이해를 전파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시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탈진장치의 발전과정과 기계시계의 기술 중에서 최상의 탈진장치인 뚜루비용의 발명과 원리를 지금 이 시점에 우리나라의 시계인들에게 자세하게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36년 전 한 프랑스 고객에게서 들었던 이 시계 장치를 80년 초반에 외국의 시계 전시장에서 만나고 이 시계 장치를 만드는 것이 모든 시계사들과 시계제조사들의 꿈이라는 말을 수없이 실감하였다.
 
인류가 지구라는 별에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에, 아니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가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탄생과 소멸일까? 또는 모든 것을 이루고 있는 분자립의 구조일까?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가 피할 수 없는 것 그리고 지구상에서 가장 공정하고 정확하게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에 대해 또 하나가 있다면 중력( 重力 )일 것이다. 
 
달리는 자동차의 바퀴도 그냥 그저 회전하면서 굴러가는 것이겠지 하겠지만 대지 위를 밀착하면서 구르는 타이어도 중력의 영향에서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자동차를 정비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자동차의 타이어의 휠 밸런스에 문제가 있을 경우 저속도의 경우에는 문제가 없으나 고속주행 때에 자동차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만일 이런 경우에 운전자의 작은 실수와 또는 도로에 작은 문제에 부딪치면 사고와 직결된다.
 
자동차의 타이어 밸런스는 사고와 직결되고 생명과 연결되는 문제이니 이 타이어밸런스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는 운전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계식 시계의 심장부인 밸런스도 지구의 중력에 영향을 받으며, 시계의 밸런스에 편중이 발생하면 그 시계의 상태는 시계의 늦고 빠름이 일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소비자는 극소수이며, 설령 이 밸런스의 문제를 알고 있다 하여도 시계의 기계상의 문제이며 착용하는 사용자의 신체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므로 "조금 불편하다" 라는 느낌만 있을 뿐 정작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림 5] 휴대용 시계의 밸런스의 진동각이 270° 이상 유지되어야 자세차를 극복할 수 있는 기본적인 회전운동이 보장되는 것이다.
"시계의 심장부인 밸런스의 편중" 일명 기성 시계인들이 "덴뿌" 또는 "천부" 라고 하는 밸런스의 운동은 시계의 정확성에 가장 중요한 핵심 장치이다. 오래 전 필자는 국내 최고의 시계학원에서 시계기술 세미나에 참석하였을 때 시계검정시험에 시계의 밸런스 회전각이 270° 이상이면 자세차가 없다는 강의를 하는 것을 보았으며 이 답이 바로 정답이라는 교육을 하는 것도 보았다. 필자도 기능 검정에 정답이라고 기입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이론이였으며 맞지 않는 교육이다.
 
편중이 있어도 시계의 회전각은 270° 이상을 유지할 수 있으며, 회전각이 크다고 하여 시계의 자세차가 없다는 이론은 시계의 원리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교육이며 정답은 아니다. 이미 휴대용 기계시계가 1500년 경에 제조되면서 많은 시계사들은 휴대용 시계의 자세차에 대하여 고민하여 왔으며 이에 대한 연구를 한 시계사의 기록들은 현대의 시계인들이 본받아야할 모범적인 사례들이다.
 
[그림 6] 최초의 기계식 시계의 탈진장치인 버지 탈진기를 휴대용 탈진기로 개량한 원리를 설명한 설계도이다.
초기의 휴대용 기계식 시계는 버지 탈진기(Verge Escapement)가 장착되어서 자세차를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었다. 버지 탈진기는 초기의 기계식 시계의 탈진장치로 개발되었으며, 1300년 경 대형의 탑시계에서부터 휴대시계와 회중시계로 발전되기까지 약 400년 동안 시계의 탈진장치로 그 왕좌를 지켜왔었다.
 
버지 탈진기는 본래 대형 탑시계의 탈진장치로 개발이 되었으며 휴대용 탈진장치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장치이다. 기록으로 볼 때에 현재에도 남아있는 독일의 시계사 헨리 드 빅(Henri de Vic)에 의해서 1370년 만들어져 파리 재판소에 설치되었던 버지 탈진기를 장착한 기계시계는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하루 오차가 2시간 정도여서 헨리 드 빅은 이 시계의 시간을 수시로 수정하기 위하여 자신이 만든 탑시계 안에서 일생을 살아가며 수시로 해시계에 맞추어서 시간을 수정하였으며, 시간장치를 구동시키는 200kg이 넘는 중추를 감아 올려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시계를 제조한 시계사가 도대체 무슨 죄가 있기에 일생을 시계탑 안에서 시간을 수정하고 중추를 감아 올려야하는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당시의 세태가 아닌가...
 
초기의 휴대용 기계시계에 장착된 버지 탈진기의 작동을 살펴보면 휴대용 시계에서는 밸런스의 운동을 지원하는 유사(Hair Main Spring)의 발전이 따라주지 못한 것도 큰 이유인 것도 하나인 것은 사실이다.
 
[그림 7] Huygens의 친구 비비엘 쁘찌가 시계의 마찰을 증가시킨다며 제거를 건의하였던 에스케퍼 중계차.
그러나 버지 탈진기는 밸런스가 자유진동을 할 수가 없으며 버지 탈진기를 시계의 탈진장치에서 퇴출시킨 실린더 탈진기(Cylinder Escapement)도 밸런스의 진동은 버지 탈진기와 다름없는 진동각(90° ∼ 120°)이였다.
 
시계의 정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밸런스의 자유진동이 보장되어야 하므로 많은 시계사들은 자유진동을 얻을 수 있는 탈진장치 개발에 전력을 기울려 왔었다.
 
초기 진자시계를 개발하여 시계의 역사에 한 시대의 전환기를 마련한 네델란드의 크리스찬 호이헨스(Christian Huygens)도 버지 탈진기의 범주에서 탈피하지 못하였으며, 그는 최초로 시계에 밸런스와 유사를 장착하는 개가를 이루었음에도 버지 탈진기로 인하여 밸런스의 자유진동을 보장받지 못하여 밸런스의 자유진동을 얻기 위해서 버지 탈진기에 보조 기어를 채택하는 등 수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장치를 하여 당시에 자신의 친구인 비비엘 쁘찌(1594-1658:크리스찬 호이헨스의 친구이며 천문학자로 수학자이기도 했다)에 의해 조심스러운 지적을 받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으며, 밸런스와 유사를 개발하는 개가를 이룬 후에는 영국의 드함 박사에 의해서 호된 비평을 받는 수모를 또 한번 받게된다.
 
그것은 시계의 역사에서 한 시대를 종지부를 찍는 개가를 이루었던 이 위대한 대학자도 버지 탈진기를 탈출하지 못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이었다.
 
[그림 8] 호이헨스가 발명한 최초의 유사와 밸런스의 구조이다. 이 그림을 보면 그는 밸런스의 회전운동을 자유진동으로 만들기 위해서 중개차를 첨가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마찰이 증대되어 시계가 자주 멈추어서 다시 흔들어 주어야 작동을 하여 영국의 드함 박사에 의해서 호된 비판을 받았다.
호이헨스는 이런 비난을 두 번이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연구하였으나 결국 새로운 탈진장치를 개발하는 것을 포기한 것 같다. 후에 그는 마린크로노메타를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버지 탈진기와 그가 발명한 진자시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좌절하고 말았으며, 1665년 왕립협회의 전 회장이었던 로버트 머레이(Robert Moray)에게 보낸 호이헨스의 편지를 보면 그는 자신이 발명한 밸런스와 유사가 기계시계의 성능을 좌우하는 위대한 발명이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한 채 그의 일생을 마감한 것 같다.
 
[그림 9] 1781년 토마스 이안사우(Thoms Earnshow:1749-1829)에 의해서 발명된 크로노메타 탈진기(Spring Detent Escapement:자유 진동식 탈진기)의 개량형.
호이헨스의 경우를 보면 초기 기계시계의 탈진장치의 버지 탈진기는 500여 년을 기계시계에 장착되어 인류의 시각을 보존하는데 기여를 하였으나, 이 버지 탈진기의 벽을 넘어서지 못한 시계사에게는 악마의 장치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그림 10] 18세기 영국에서 제작된 회중시계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우수한 탈진장치와 시계 구조를 채택하지 않고 버지 탈진기를 고집하여 시계의 두께를 투박하게 생산하였다.
1657년 6월 16일 호이헨스에 의해서 진자시계가 발명되고, 18년 후 1675년에 그가 다시 Hair Main spring(유사)과 Balance를 발명하기 2년 전 1673년에 독일인 윌리암 클레멘트(William Clement)는 퇴각형 탈진기를 발명하여 시계에서 버지 탈진기(Verge Escapement)를 추방시키는 첫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퇴각형 탈진기는 진자의 진폭 운동에 의해서 탈진장치의 에스케퍼 기어가 약간 뒤로 후퇴한 후에 전진을 하므로 이 운동을 퇴각형 탈진기(Recoil Escapement)라고 불리고 있다. 그러나 네델란드와 독일의 시계 발전을 시기라도 하듯이 영국의 시계사에서 지울 수 없는 위대한 3대에 걸친 사제지간의 시계사들의 업적을 우리는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토마스 톰피온(Tomas Tompion)은 17세기 말 런던의 저명한 시계공장의 지도자였다. 그는 "영국 시계의 아버지"로 칭송을 받았다. 그의 제자에 죠지 그래함(George Graham) 그리고 그의 제자에 토마스 머지(Tomas Mudge)가 나왔다. 이 세 사람은 영국시계 산업에 뿐만 아니라 세계시계발달에 크게 기여한 위대한 3대에 걸친 사제지간이었다.
 
Graham은 1715년 지금도 아직 그의 이름이 붙어 있는 직진형 탈진기(Dead Beat Escapement)를 발명했으며, 이어서 수은 보정진자(Mercurial Compensation Pendulum)를 발명하였다.
 
이 두 가지의 발명 덕분으로 진자시계(Pendulum Watch)의 정도는 한 단계 향상되었으며, 또한 그는 1695년에 그의 스승인 Tompion이 고안한 실린더 탈진기(Cylinder Escapement)를 개량하여 실용화시켰다. 이 탈진장치(Escapement)가 시계의 무브먼트로부터 버지 탈진기(일명 관형탈진기 Verge Escapement)를 완전히 추방시키고 말았다.
 
[그림 11] 영국의 회중시계는 풀 플레이트 방식과 버지 탈진기로 인하여 무브먼트의 두께는 얇아질 수가 없었다.
이들 삼대에 걸친 영국의 시계사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시계사들은 한결같이 이상하게도 19세기 초기까지 버지 탈진기를 장착하는 시계를 만들고 있어서 영국의 시계사들의 보수적인 성향을 엿볼 수 있다. 버지 탈진기의 단점은 밸런스의 자유진동을 보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시계의 무브먼트의 두께를 얇게 할 수 없다는 점이 큰 단점이다.
 
또한 그들은 한 술 더 떠서 시계의 무브먼트를 풀 플래트(Full Plate)형식으로 고집스럽게 사용하고 있어서, 버지 탈진기와 풀 플래트 방식은 영국의 시계를 투박하고 두꺼우며 시계의 사후 관리인 수리와 정비에 많은 수고를 들이게끔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 시기에 이미 프랑스와 스위스, 독일 등의 시계사들은 퇴각형과 직진식뿐 아니라 실린더 탈진기를 포함하여, 또한 1781년 토마스 이안사우(Thoms Earnshow:1749-1829)에 의해서 발명된 크로노메타 탈진기(Spring Detent Escapement:자유 진동식 탈진기)를 채용하였으며, 동시에 루핀 케리바(Lepine calibre, 영:caliber)를 채용한 무브먼트로 인하여 시계의 두께는 얇아지고, 소비자들의 유행을 선도하게 되어 영국의 보수적인 시계는 결국 역사의 차가운 경쟁에서 뒤쳐지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림 12] 초기의 호이헨스의 유사는 3회의 나선형으로 감아져 있었으나, 그 후 8회 또는 12회 이상의 나선으로 감아져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크로노메타 탈진기는 주로 선박용 크로노메타 탈진기에 사용이 되었으며, 이 탈진기에 사용되는 유사는 원통형인 코일형 스프링 유사를 사용하여 자세차는 매우 좋지 않았으나, 1781년 발명되었던 티텐트 탈진기를 1999년 재현한 파텍 필립사의 티텐트 탈진기는 휴대용으로 전혀 손색이 없으며 지난 2000년 경매시장에 20억에 평가가 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들 시계의 밸런스 진동이 360° 이상이 보장이 되는 자유진동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며, 진동각이 180° 마저 보장이 안 되는 버지와 실린더 탈진기에 비하면 획기적인 탈진장치가 아닐 수 없다.
 
이 시기에 브레게(Abraham Louis Breguet)는 시계의 밸런스 진동운동 중에 피할 수 없는 중력에 의한 자세차를 극복하기 위해서 시계의 유사의 외단을 한 단계 감아 올린 방법을 경험적으로 발견하여 오늘날 고급시계에 널리 사용되는 이중유사를 개발하였다.
 
물론 이 이중유사(일명 브레게 유사 Hair Spring)의 아이디어는 존 아놀드(John Arnold)가 1776년에 처음으로 생각해 낸 것으로 당시 많이 사용되었던 크로노메타 탈진기에 사용되는 원통형 유사(Helical Hair Spring)에서 그 아이디어를 착안하여 브레게가 오랜 경험 속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이 생각은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이다.
 
그 이유는 브레게는 이 획기적인 발명품인 이중유사를 발명하였으나 이론적으로는 설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림 13] Abraham Louis Breguet가 발명한 Breguet Scroll Hair Spring(이중 소용돌이 수염 유사). 외주에 한 겹을 더 감아 올림으로 해서 Balance Staff Pivot의 측면압의 감소와 작동시의 수염태엽(Hair Main Spring)의 편중에 의한 중심이동으로 인하여 자세차의 감소를 달성하였으며 등시성을 향상시켰다.
브레게의 이중유사의 종단을 특별한 곡선으로 구부리는 목적은 유사의 중력 중심이 늘 Balance의 중력 중심과 일치하게 하기 위해서인데 이것을 이론적으로 해석한 것은 프랑스의 전광산기사 에드워드 필립(Edouard Phillip:1821-1889)교수로 프랑스인 시게사 쟈코브가 이 문제를 프랑스 수학연구소로 들고 들어가 거기서 Phillip교수를 설득하여 2년 만에 해석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필립(Phillip) 교수는 1861년에 "Chronometer와 시계에 사용되는 나선형 평유사(Scroll Hair)의 조정에 관하여" 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이것에 의하면 Chronometer에 사용되는 원통형 유사(Helical Hair Spring)의 해석이 주체로 시계에 사용되는 유사(Hair Spring)에 관해서는 최소한에서 멈추고 있다.
 
당시 스위스의 쥬레스 그로스만(Jules Grossmann:1829-1907)은 이 논문을 읽고 큰 충격을 받고 그 때까지 극비로 연구를 계속 해온 자기의 일을 계발( 啓發 )하기에 이른다.
 
그는 그 때까지 시계사로서 실제적인 직업인으로 휴대시계의 수직자세와 수평자세의 위치 변경에 따르는 난조나 회중시계(Pocket Chronometer)의 보도를 일정하게 하는 어려움에 부심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전혀 똑같은 두 개의 회중시계(Pocket Chronometer)를 각각 수평으로 뒀을 때 문자판 위(Dial 위)와 늘여뜨렸을 때, 용두 상(Winding Button) 등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결과는 한쪽은 7초의 자세차가 있었고 다른 한쪽은 1초의 자세차를 나타냈다.
 
그는 이것에 의문을 갖고 각각의 휴대시계에서 천부(Balance)에 유사(Hair Main Spring)를 붙인 그대로 들어내서 그것을 세밀하게 비교, 검사해 보았더니, 한쪽 유사는 콜렛(Collet)을 붙인 위치가 Balance의 중심을 통과한 수직선상에 있는 것에 대하여 다른 쪽은 수직선상에 와 있지 않았다.
 
그 외는 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자세차가 큰 쪽의 Pocket Chronometer가 붙어 있는 Hair Main Spring 내경을 절반정도 Cut해서 Balance의 중심을 통과한 수직선상에 오도록 해 놓았다.
 
[그림 14] 호이헨스가 1675년 2월 5일 나선형 유사의 특허를 신청하여 10일 후 허가를 취득하자 아베 오토프이유가 자신의 발명을 침해하였다고 이의를 신청하였다. 그러나 아베의 유사는 나선형이 아닌 그림과 같은 직선형이다. 결국 아베의 이의는 기각되었다.
유사의 짧은 쪽은 Balance Ring(천부 아암)에 추를 달아 보정하며(무게를 더하여) 다시 한번 시험해 본 결과 자세차는 한결 작아졌다.
 
이와 같이 해서 "Hair Spring의 장착 위치의 법칙"을 발견한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아니하고 이 문제를 더욱 철저하게 추구해 나갔다.
 
여기서 깨닫게 된 것은 "Archimedes의 Scroll Hair"의 중력 중심을 Balance의 중심에 유지하게 하는 인위적 수단의 발견이었다.
 
그는 유사(Scroll Hair Main Spring)의 내단과 Collet의 간격을 넓게 잡고 중심부에서 "내단곡선"으로 불리는 제2의 종단 곡선을 만들어 보았다. 이것이 성공하여 수직방향의 자세차를 지금껏 Tourbillon 시계에서만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할 수가 있었다.
 
쥬레스 그로스만은 설립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루·로클 시계학교의 교장으로 1868년부터 1901년의 33년 간 후진의 지도에 임하였다. 그의 아들 엘만 그로스만(1863-1928)은 아버지의 업적을 1908년 「이론 시계학」이라는 책으로 저술하였다.
 
Part. 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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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시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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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자대학교 교수 정 윤 호